일감은 4년치, 사람이 없다 — 슈퍼사이클에 올라탄 K-조선의 역설

지난 7월 23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계약 하나가 체결됐다. 한쪽은 HD한국조선해양, 다른 한쪽은 독일 지멘스의 소프트웨어 부문이다. 조선사가 해외에서 맺는 계약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상대가 선주도 기자재 업체도 아닌 소프트웨어 회사라는 점이 눈에 걸렸다. 그것도 양해각서 수준이 아니라 본계약이다.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우는 중인 조선사가 왜 지금 소프트웨어에 돈을 쓰는지, 그 배경을 따라가 보면 지금 조선업이 서 있는 자리가 보인다.
숫자만 보면 완벽한 호황
올해 조선 빅3의 성적표부터 보자. HD한국조선해양·삼성중공업·한화오션의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2조 원대였다. 2분기 시장 컨센서스는 합산 매출 15조 원 이상에 영업이익 약 2조 3,000억 원. 이 속도면 연간 합산 영업이익이 9조 원을 넘기고, 증권가 일부는 10조 원 돌파 가능성까지 거론한다. 세 회사가 쌓아둔 수주잔고는 약 190조 원(1,370억 달러) 수준이고, 연내 200조 원 재돌파가 유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믿기 어려운 숫자다. 2010년대 중반의 조선업은 수조 원대 적자와 희망퇴직, 도크 폐쇄의 시기를 지났다. 그 구조조정을 버텨낸 회사들이 이제는 3~4년치 일감을 확보해 두고, LNG 운반선 같은 고부가가치 선박만 골라서 수주하는 처지가 됐다. 낮은 값에는 배를 짓지 않겠다는 배짱이 통하는 시장이다.
그런데 업계 안쪽에서 나오는 말은 온도가 다르다. 올해 초부터 돌기 시작한 표현이 있다. "모래성 호황".
도크는 찼는데 작업복이 빈다
수주잔고 190조 원이라는 말은, 뒤집으면 앞으로 몇 년간 그만큼의 배를 실제로 지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배를 용접하고 조립할 사람이다. 선각·용접 같은 현장 직종은 업무 강도가 높고 야외 작업이 많은데, 지난 불황기에 연장근무가 줄고 단가가 깎이며 소득이 급감하는 걸 지켜본 젊은 세대는 조선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회사 장부는 흑자로 돌아섰어도 "조선소는 힘든 곳"이라는 인식은 그 속도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조선업을 가르는 질문은 수주 금액이 아니다. 받아놓은 배를 제때, 제 원가에 지어낼 수 있느냐다. 납기가 밀리면 지체보상금이 나가고, 공정이 밀리면 도크 회전율이 떨어진다. 그 손실은 지금의 화려한 영업이익을 곧바로 갉아먹는다. 수주잔고는 수행 능력이 받쳐줄 때만 자산이다.
세 회사가 내놓은 답안지
빅3의 최근 행보를 나란히 놓고 보면 방향이 하나로 모인다. 부족한 사람을 채우는 대신, 조선소의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쪽이다.
서두의 그 계약 — HD한국조선해양이 지멘스와 맺은 '차세대 마린 플랫폼' 본계약이 대표적이다. 선박 설계부터 생산, 공급망, 품질, 유지보수까지 전 공정 데이터를 3D 모델 기반의 단일 데이터로 통합해 일정 지연과 품질 문제를 줄이겠다는 내용이다. 올해 상세 개발에 착수해 2028년부터 국내 주요 사업장에 순차 적용하고, 장기적으로는 로봇과 자율 생산설비가 작업 상황을 스스로 판단해 움직이는 '피지컬 AI' 조선소로 발전시킨다는 로드맵까지 걸었다.
삼성중공업은 배관 절단부터 용접까지 이어지는 공정의 AI 자동화를 추진하고 있다. 조선소에서 사람 손이 가장 많이 가면서 사람 구하기는 가장 어려운 공정부터 기계로 메우는 순서다. 한화오션은 선박 건조 로봇 사업을 발주해 용접 자동화를 진행하는 한편, 약 8,000억 원 규모의 태국 차세대 호위함 사업과 잠수함 수출 같은 방산 특수선으로 사업 폭을 넓히고 있다.
발주처가 조선소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이런 움직임을 한국 조선사들의 유행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 발주처의 평가 기준이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도크 크기와 건조 실적이 척도였다면, 최근에는 설계·생산·물류·품질 데이터를 통합해 공정 계획과 자원 배치를 예측하는 능력, 이른바 스마트야드 역량이 수주 경쟁력의 변수로 올라왔다. "자동화 조선소가 수주를 가른다"는 문장이 업계 기사 제목으로 나오는 시절이다.
선주 입장에 서 보면 이해가 간다. 어느 조선소든 도크가 몇 년치씩 차 있는 상황에서, 선주가 확인하고 싶은 건 결국 납기다. 빈 도크로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조선소가 없으니, 공정 데이터로 납기를 증명하는 조선소가 선택받는다.
로봇보다 먼저 놓아야 할 것
다만 이 그림에는 잘 안 보이는 전제가 하나 깔려 있다. 로봇 용접이든 AI 공정 예측이든, 설계·생산·품질 데이터가 한 몸으로 흐르고 있어야 작동한다는 점이다.
현장의 사정은 아직 그 전제와 거리가 있다. 설계 데이터 따로, 생산 실적 따로, 협력사 공수는 엑셀로, 품질 기록은 또 다른 시스템에 흩어져 있는 게 보통이다. 이 상태로는 어떤 AI를 얹어도 쓸 만한 예측이 나오지 않는다. HD한국조선해양과 지멘스가 계약의 첫 키워드로 '단일 데이터'를 앞세운 것도 같은 진단으로 읽힌다.
데이터를 한 몸으로 만드는 작업은 화려한 기술이라기보다 기초공사에 가깝다. 프로젝트·블록·공정·직종을 관통하는 코드 체계를 세우고, 공수·일정·원가가 같은 기준으로 집계되도록 정리하고, 현장 실적이 제때 시스템에 들어오게 만드는 일. 여러 조선·중공업 현장을 지원하면서 우리가 반복해서 본 것도, 디지털 전환의 성패가 이 지루한 구간에서 갈린다는 사실이었다.
슈퍼사이클은 언젠가 끝난다. 지난 사이클의 교훈이 있다면, 호황기의 이익을 어디에 투자했느냐가 다음 겨울의 생존을 갈랐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그 투자가 도크 확장이 아니라 데이터와 소프트웨어로 향하고 있다. '모래성'이라는 말을 반박할 근거가 있다면 아마 거기서 나올 것이다.
디티솔루션은 조선·중공업 현장에서 공수관리·공정관리(EVMS)·문서관리 시스템을 구축해 왔습니다. 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사 프로젝트에서 검증한 데이터 통합 경험으로, 스마트야드 전환의 기초공사를 함께 설계합니다. 상담으로 문의주세요.